컴퓨터는...

생각을 하는 데 정말 방해가 되는군요...

 

컴퓨터 속의 세상은 정말 방대합니다..

수많은 게임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자료들이 있고, 심지어 친구들도 인터넷으로 만나고, 이젠 과제물은 물론이고 수업까지 인터넷으로 해결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심각한 귀차니즘으로 인해 암흑의 루트는 물론이거니와 메신저도 잘 안하는 편입니다만, 인터넷이 안되도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할일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이고 자시고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 요즘은 그것이 짜증납니다...

글을 쓰고싶어도 생각이 안나니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상의 글들은 주의깊게 읽기가 힘듭니다.

제작년, 아니 작년만해도 책상머리가 아니더라도 버스 안에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사색들을 정리하면서 글을 끄쩍이고, 그러다가 간혹 제 자신조차 괜찮다는 생각을 건지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가 아닌 아날로그데이터를 읽으면서 깊이에 대한 갈망을 가지곤 했습니다. -이건 깊이에 대한 강요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이젠 컴퓨터가 제 삶의 깊이를 자꾸만 앗아가는 것 같습니다만, 이젠 컴퓨터를 벗어날래야 벗어나기 어려운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으니말입니다...

by 크라드메서 | 2006/11/19 20:52 | 蒼天之望 | 트랙백 | 덧글(0)

[감평]디트리히 본회퍼 : 나를 따르라-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이 책에서 나는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어떻게 그의 삶이 변화했는지를 볼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물론 나는 내가 기대했던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목회자나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너무나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너무나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신학적 관점을 가진 그 인간을, 아니, 그 그리스도인을 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전기를 읽고나서, 나는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있음을 알았다. 그 이유는 그와 그를 둘러싼 이들의 생애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살아갔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로간의 신학적 관점이 너무나 다를지라도, 그들의 초점은 그리스도에 맞춰져 있었기에 그들의 공동체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건실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과 종교와 민족과 계급과 사상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섬겼고, 또한 그것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났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인해 따라오는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을 너무나 익숙하게 대하고, 너무나 식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망할 휴머니즘이 우리의 가슴을 딱딱하게 만들었기에 우리들에겐 인종·민족차별, 홀로코스트, 인간성에 대한 모독들은 이제 더이상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 끔찍한 고발이 있다. 호산나를 외치다 며칠이 채 안되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우리들의 모습이, 그리고 서로에게 대하여 호시탐탐 악을 행하려는 치욕스러운 죄악의 모습들이 드러나 있다. 단지 악을 행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 악에 동의하는 그런 모습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여기 너무나 놀라운 선포가 있다. 그렇게도 악에 찌들은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있음을 담담히 선포하는, 그렇게 살아있는 복음의 산 증인들의 선포 말이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 세상에 임할 것임을 바라는, 단지 낙관주의이기에 남는 것이 아닌 진정 담담한 소망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책 이야기

by 크라드메서 | 2006/09/10 00:18 | 蒼天之望 | 트랙백 | 덧글(0)

밤...

보통 우리는 일년의 계절을 셀 때 이렇게 셉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런데 일년의 시작인 1월은 명실상부한 겨울이란 말이입니다...




생명체들의 라이프서클Life circle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겨울의 안식에서 깨어나, 여름을 살고 가을에 결실을 맺고 죽죠... 그리고 겨울동안 그 씨앗들은 긴 잠을 자며 안식을 누립니다...




저는 밤 또한 그렇다고 봅니다. 보통 우리는 일출로 하루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계절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는 하루의 시작은 새벽, 즉 일출 전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유대인들은 일몰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는지도 모르겠군요...




일몰이라 하는 순간은 격변의 순간이다. 변화와 생동이 춤을 추던 낮이 종결을 고하고 밤이 시작되려는 순간... 어쩌면 하루의 일상을 끝내야 된다는 것에서 아쉬움과 회한을 느끼는 시간이 될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밤은 반드시 또다른 낮을 약속합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기를 세상이 어둡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는 삶은 밤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밤을 걸어가는 것 처럼 우리의 살아가는 삶 또한 앞일을 밝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금 밟고 있는 그 아래가 단단한 포석일지, 아니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한 널판지 위인지 모르는 것 처럼...



 

지금 알 수는 없겠죠. 그러나,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나아가는 발걸음이 새벽을 향한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어둡고 힘들다고 하지만, 이 밤의 시간들은 반드시 일출을 가져올 새벽을 약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새벽을 맞이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 더 나아가 준비의 시간으로 알차게 쓰는 것이 보람되다는 생각이 듭니다...

by 크라드메서 | 2006/08/09 17:13 | 灰天短想 | 트랙백 | 덧글(0)

신관웅




2006. 06. 28  홍대 문글로우 - V6

 

우리나라 Jazz의 1세대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가 중 하나이죠... 저는 피아노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어 피아노 소리라면 왠만하면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제가 특히 이 피아니스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사람이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만드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엘범을 보면 그 중에 <Family>라는 엘범과 <Friends>라는 엘범이 있습니다. 거기엔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헌정하는, 헌정받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그 사람의 테마로 만들어진 곡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왠지모르게 유명하고 음악적인 곡들보다도 그런 곡들이 더 끌리더군요.

 

그래서일까요... 만일 제가 음악을 한다면, 이 사람처럼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by 크라드메서 | 2006/08/07 18:59 | 蒼天之望 | 트랙백 | 덧글(0)

문득 드는 의심..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나에게는 문제가 없을까? 아니다. 지금의 나에게는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 들어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반응 속에는 내 자신에 대한 문제점이 있음을 시사하는 반응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것은 무엇일까?


두렵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두렵다. 내 안을 계속 들여다보지만 나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무언가 고칠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이 안 보인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조리들이 얽히어 내 주변을 왜곡한다는 감각이 마비되어간다. 결국 내 자신의 본질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간다. 그래서 계속 반문하게 된다. 나는 도대체 뭐하는 놈일까.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

by 크라드메서 | 2006/08/06 05:32 | 蒼天之望 | 트랙백 | 덧글(0)

"실패하다"


 

  얼마전 수업시간이었다.

 

  수업 과제물의 주제는 "21세기, 종교는 필요한가?"이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종교의 필요성에 대한 변증을 펼쳤다. 이성주의의 무의미함, 인간 본성이 종교를 요구한다는 점(특히 그리스도교를 '요구'하는 본성등에 대하여)등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그런데 수업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수업에서는 "나"가 주인공인 종교와 자신과의 관계를 물어보고 있던 것이었다. "21세기에 종교는 필요한가-자기 경험을 토대로하여 주장하시오."

 

  선생님께서 학생 대다수가 놓쳐버린 그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실 때, 많은 학생들은 그런게 어디있냐며 항의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21세기에 종교같은 그런 것에 일일히 신경쓰며 사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대부분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기에 급급한데... 하지만 의외로 자기 삶 속에서 충실하게 그런 것을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몇명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광신성에 대해 말하지만 광신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멀어져가기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그 위기의식속에서 교회는 양적 성장에 광적으로 집착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가 아니에요!"

 

  "어찌어찌하다보면 이상한 길로 헤메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그리스도는 제 영혼의 안식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 말들이, 그 누군가가 썼던 말들이 선생님의 마이크에서 흘러나올 때, 내 귀에는 다른 사람들의 푸념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나만은, 나만큼은 내 실패에 대하여 자인하며 두려워 떨며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나의 삶을 도외시한 나의 믿음은 변증과 변론이었을 뿐, 삶이 되지 못했던 것이었다. 늘 언제나 나의 논리는 이성과 객관성의 무의미를 지적해왔지만, 어느새 남들의 기준에 맞추려고 그것들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나"를 도외시하고... 그렇게 나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역사를 도말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나 신앙의 중심은 "나"이다. 믿음 안에서 나는 그 누구도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내가 만족시켜야 될 유일한 대상은 이미 나의 믿음에 대하여 만족하고 계시다. 나는 단지 나의 믿음과,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다른이들이 지켜보게 놔두고 나의 길을 따라 그분께로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와 주님사이의 역사를 써가는 것이다. 단 둘만이 공유하는 역사말이다...

by 크라드메서 | 2006/07/30 01:24 | 灰天短想 | 트랙백 | 덧글(0)

어떤날...

때때로 잊고 지내던 나의 비참함을 다시 깨닫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괴롭고, 외롭다.


지금 이 날까지, 나는 다만 무엇을 바랬기에 살아온 것일까.


 

무의미한 반복, 반복되는 심장박동과 호흡...


지겹도록 괴롭다. 내가 이리도 비참하건만, 이 비참이 동정심 한 줄기조차 드리우지 못할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이 비참함은 태산이 되어 짓누른다.


나는, 동정받기엔 너무 악한 것일까.


숨결 한줄기 한줄기에 죄스럽게 이으며 살아가는 나는, 쉴 수 있는 누군가의 고마운 관심의 그늘조차 없다.


 다만 보며,


 다만 생각하고,


 다만 노래할 뿐이다.


 

 슬픈 자기변명. 그래서 우리들은 변명들을 내어놓게 되는 것일까. 이 비참한 육신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고 아름답게 치장하듯이.


그러나 옷을 입어도 치부가 그대로 남아있듯이 변명들로 점칠을 하여도 우리들의 이 비참은 사라지지가 않는다. 이젠 떠난다.


 변명이 비참함을 없애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떠난다.


 어떤 때는 이 비참함을 없애줄 무언가를 찾아서,


 어떤 때는 다른 이들의 비참함으로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삼라만상으로 잠시 잊어보려고,


 

 어떤 때는 그냥, 이 텅 빈 것만 같은 혈관을 무언가의 액체로 채워보고 싶어서,


 떠난다... 그래, 그렇게 잠시 잊을 수는 있다. 그러나...




때때로 잊고 지내던 나의 비참함을 다시 깨닫게 되는 날이 있다.

 

by 크라드메서 | 2006/07/25 03:51 | 蒼天之望 | 트랙백 | 덧글(0)

기다림...


똑, 딱, 똑, 딱,

기다림의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얼마나 기다린 것일까? 10분? 아니, 15분?

불안 속에서 전화라도 걸어보고 싶다.

"오고 있는거야?"

그러나 입력된 전화번호에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핸드폰을 덮고 만다.

나는, 믿는다. 그 사람은 반드시 올거야...

시계를 보면서 몇시인지 확인할 때마다, 그 순간들마다 나의 믿음은 시험받는다.

'20분이 지났어.'

'엇, 이번엔 벌써 23분이나...'

그 사람을 향한 나의 믿음을 시험하는 불안은 나를 조롱한다.

"안 오는게 아닐까? 아니면 이미 왔다가 갔는지도 몰라."

불안 앞에 태연해지려고 약속을 재확인한다. 혹은 지난 스케줄을 재점검하거나 그보다 앞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불안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지난 시간, 그 사람과 지낸던 일들을 생각한다.

회고하고, 추억한다.

나는 그렇게 <내가 아는>그 사람을 다시 점검한다.

'온다, 반드시...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믿기에...

때론 그 믿음이 헛되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보상받는다. 그 사람의 등장으로...

더할나위 없는 보답. 믿음이 옳았다는...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기다림은 믿음이다.

나는 그렇게 내가 순간 순간 기다리는 그 누군가를 믿는 믿음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by 크라드메서 | 2006/07/23 00:54 | 灰天短想 | 트랙백 | 덧글(0)

사랑은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예라면...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나가들을 향했던 케이건의 사랑-단지 나와 다르다는 것이 거대한 사랑의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그 사랑-과 케이건을 향했던 여름의 사랑을 볼 수 있겠군요...


사랑은... 사랑은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말뿐이고, 사념뿐일 사랑이라면, 그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또한... 그 사람이 '이성이라서' 사랑한다든가, 그 사람의 외양이 '아름다워서' 사랑한다든가, 그 사람이 '나랑 잘 맞아서' 사랑한다면, 그 역시 그 사랑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누구나 하는, 그런 호인의 사랑일 뿐인데... 어쩌면 사랑은 가장 가치없는 그 무언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 역시 사랑이 없는 땅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어떤 이의 말에 깊게 동의할 수밖에 없고,

사랑이 없다면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고백하던 또다른 누군가의 말에 깊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 사랑도 아직은 말과 사념에 얽혀있을 뿐인, 그런 것이군요...

by 크라드메서 | 2006/07/21 12:11 | 灰天短想 | 트랙백 | 덧글(0)

예술...

  예술의 목적이 美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아름다움이 예술의 추구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겠는데, 아니다. 만일 예술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름다움이라면, 아름다움이 아닌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작품들은 무엇이 되겠는가? 예를 들어, 맹목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노래나 정의를 부르짖는 시 등 말이다.

 

  예술이 지향하는 가치는 표현, 즉 공감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 있는 타자를 구하는 것이 예술의 기본적인 지향가치이다. 구애한다? 나를 사랑해줄 <타자>를 구하는 것이다. 정의를 부르짖는다? 같이 정의감을 불태울 <타자>를 구하는 것이다. 미술 전시회에서 사람들은 화가에게 묻는다.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셨습니까?” “…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같은 질문을 작곡가나 연주가에게 물어봐도, 시인과 소설가에게 묻는다고 해도 같은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의 …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몰라서 헤매지 않는다. 다만 그리도 거창하게 타자를 구하고자 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헛돌지라도 애써서 부정하고 싶어서 방향을 이상한 곳으로 잡는 것이다.

by 크라드메서 | 2006/07/19 22:15 | 灰天短想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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